아침 일찍 푸에르토 나탈라스를 출발하여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어 엘 칼라파테에 도착했다. 국경 검문은 칠레에 비해 여러모로 허술했다. 어차피 검문소를 통과하는 사람 대부분이 여행객들이고, 딱히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뭔가 들고 갈만한 게 없기도 하다.
원래 이날의 일정은 엘 칼라파테를 거쳐 엘 찰텐까지 이동하는 것이었다. 다만, 하루 안에 엘 찰텐까지 가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과 버스 표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엘 칼라파테에는 늦지 않게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 버스 정류장에서 전날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입구에서 헤어졌던 부부분들과 재회했다. 마지막 산장을 떠날 때, 짐이 많던 나를 도와주시겠다며 내 등산 스틱을 맡아주셨는데 그대로 헤어지는 바람에 스틱을 계속 갖고 계셨고, 스틱을 돌려주기 위해 혹시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셔서 기다리고 계셨다고 한다. 스틱을 되찾고 감사해하던 가운데 내가 엘 찰텐 표를 구하는 중이라고 하자, 아버님께서 마침 린다 비스타 호텔에 들러야 할 일이 있으니 같이 가서 린다 비스타님께 한 번 여쭤보라고 하셨다.
농담 반 진담 반, 한국인의 엘 칼라파테 여행의 시작과 끝은 린다 비스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믿거나 말거나…), 엘 칼라파테 여행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린다 비스타님의 도움을 받고 있다. 사실 본명이 린다 비스타는 아마 아닐 것이고(린다 비스타 Linda Vista는 아름다운 전망이란 뜻의 스페인어이다), 린다 비스타 아파트먼트 호텔의 사장님께서 카카오톡에서 린다 비스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시다 보니 그리 불리우게 되셨다.
이곳에서 운영하고 계신 숙소는 부킹닷컴 올해의 숙소로 여러차례 선정될 만큼 평이 좋았다. 아르헨티나 이민 생활 10년 가운데 5년을 엘 칼라파테 지역에서 보내셨다는데, 스페인어도 워낙 능숙하시고, 기억이 맞다면 영어도 잘하셔서 한국인 뿐 아니라 아르헨티나 현지인, 그 밖에 외국인들 모두에게 아주 인기 많은 숙소였다. 특히나 남미의 북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칼라파테와 파타고니아 지역을 알리고,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많은 편의를 제공하고 계셨다. 그래서 뭔가 엘 칼라파테에 도착해서,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일단 린다 비스타님께 찾아가서 공손한 자세로 많은 조언을 구할 것을 추천한다.
단, 린다 비스타님께 요청하면 다양한 관광 및 교통편 예약이 가능한데, 정가보다 더 할인해서 파시면 팔았지, 그걸 남겨 먹어서 장사하시는 분이 아니다. 또한, 린다 비스타님은 단순히 표를 구해주시는 역할일 뿐이며, 관광이나 교통 서비스를 제공하시는 게 아니니, 문제 발생에 대해 린다님께 항의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여행하면서도 엄한 린다님께 머라하거나 이것 저것 요구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저 한국인들 관광 도와주시겠다고 애쓰시는 분인데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않고 아무렇게나 대하는 태도가 너무 안타까웠다.
아무튼, 그런 린다 비스타님께 나도 엘 찰텐 왕복 버스 티켓을 빚졌다. 그리고 아침 일찍 아르헨티나행 버스를 타느라 배가 많이 고팠던 우리 일행은, 재회 및 이별 기념으로 린다님이 추천해주신 양고기 아사도 식당을 방문하기로 했다.
아사도 Asado는 바베큐 요리의 일종으로 남미에서는 바베큐라는 단어를 대신하기도 한다. 파리야 Parilla라는 숯불 그릴에 소금 간을 한 고기를 굽는 방식이다. 가장 익숙한 비주얼은, 소 한 마리를 통째로 꼬챙이에 끼워 숯불 주변에 꽂아두고 수 시간을 구운 뒤, 잘 익은 고기를 손님이 원하는 만큼 접시에 썰어주는 건데, 한국의 고기 뷔페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소고기 아사도가 일반적이었는데, 그것은 아마 아르헨티나에서 대체로 구하기 쉬운 고기가 소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 각 지역별로 구하기 쉬운 고기를 많이 이용하는 듯 했다. 극지방에 가까워 척박한 기후와 땅을 가진 파타고니아에는 이끼과 식물들이 지천에 널려있었고 이를 먹고 자라는 양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끼를 먹고 자란 양을 도축하면 잡내가 적은 고기가 된다고 하는데, 이곳 사람들 말로는 파타고니아 양고기의 품질이 중국이나 북유럽, 호주와 같은 유명한 양고기 생산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지역적 이점 탓에 파타고니아에서는 양고기 아사도가 유명한 게 아닐까 싶다.
양고기를 배불리 먹고, 한국에서의 재회를 약속한 후, 나는 엘 찰텐으로 향했다. 엘 찰텐행 버스 옆 자리에 앉은 아르헨티나 사람이 말을 걸어 잠깐 대화를 나눴는데, 음향 공학을 전공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스피커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내 전공과 직업에 대해 얘기하니 전공은 비슷한데 특이한 직업을 가졌다며 흥미로워했다. 그는 엘 찰텐에서 1주일 간의 휴가를 보낼 계획이라며 매우 들떠있었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한국 여행객들에게 엘 찰텐은 엘 칼라파테 여행 동안 하루 이틀 정도 잠깐 짬내서 다녀오는 곳에 불과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정도 시간으로는 엘 찰텐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작지만 알찬 도시, 엘 찰텐.
지금은 피츠로이 관광을 위한 도시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엘 찰텐이란 도시는 아직 40살도 되지 않은 아주 어린 도시이다. 남미의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파타고니아를 나눠가졌지만, 그 경계에 위치한 많은 지역에서 끊임없는 영토 분쟁이 벌어졌다. 이 지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965년 양국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그로부터 20년 뒤 아르헨티나는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실히 하겠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엘 찰텐이란 이름의 마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분쟁은 1994년 국제 배심원의 판결로 엘 찰텐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통치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음으로써 해소되었다.
한때 영토 분쟁의 중심지였던 엘 찰텐은 이제 아르헨티나 트레킹의 수도 Capital Nacional del Trekking 라는 이름을 달고 관광이라는 도시 기능에 집중하고 있다. 20세기 초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를 찾아온 유럽 이민자들의 이름을 붙여 만들어진 거리들은 이제 전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자그만한 도시 곳곳에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엘 칼라파테와 함께 파르케 로스 그라시아레스, 즉 빙하 국립 공원 Parque Nacional Los Glaciares에 포함된 엘 찰텐을 파타고니아의 대표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투입되고 있었다.
비록 내가 여행하는 동안에는 숙박 시설도 허접하고, 비포장 도로도 많아 여러모로 여행하기 불편한 곳이었지만 말이다. 제발 여기만은 아니길 바랐던 비포장 도로 끝에 내가 예약한 숙소가 있었다. 덕분에 캐리어를 등에 매고 다닐 수 밖에 없었는데, 몇 년 뒤에는 방문했을 때 어떤 곳으로 탈바꿈되어 있을지 기대된다. 다만, 너무 인기가 많아져서 입장료를 받게 된다면 그것 나름대로 곤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조용히 넘어서 입산하면 된다. 아르헨티나 국립공원(APN) 소속 관리 직원들이 수시로 등산로를 산책하기는 한다.
엘 찰텐 트레킹의 장점 두 가지 중 하나는 입산 시 입장료가 없다는 점이다. 파타고니아 지역의 국립공원들은 칠레나 아르헨티나나 할 것 없이 입장료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비용을 요구하지 않는 엘 찰텐은 가난한 여행객들의 마지막 희망(?)같은 곳이었다. 호스텔 체크인을 하는 동안 호스텔 주인과 구글 번역기을 돌려가며 어설픈 대화를 나눴는데, 엘 찰텐이 정말 멋진 곳이라고 자랑하더니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고선 엄지척을 했다. ‘특히 여긴 공짜에요.’
나머지 한 가지, 사실 장점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장점으로 여기는 부분은, 엘 찰텐에 처음 들어서자마자 이 도시에 온 이유이자 트레킹의 목표, 마치 연기를 내뿜듯 구름에 휩싸인 피츠 로이 산 Monte Fitz roy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이런 모습 탓에 원주민들은 이곳을 굴뚝 (Chalten)이라고 불렀고, 이후 탐험가 프란시스코 모레노 Francisco Moreno가 이 지역에 ‘찰텐’이란 이름을 붙이고는 가운데 위치한 가장 큰 굴뚝에 수로 연구선 비글호의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 Robert FitzRoy의 이름을 붙였다. 피츠로이를 향해 트레킹하는 관광객들은 틈틈이 피츠로이 굴뚝이 내뿜는 연기를 바라보며 걸어가게 되는데, 며칠을 숨어있다 마지막 순간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라스 토레스와는 대조적이었다. 지역에 들어서자마자 화면 중앙 상단에 랜드마크이자 목적지가 명확히 제시되고, 중간 중간 목적지의 위치를 확인하며 3~4시간 이어지는 트레킹…정말 명확한 동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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