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아이아에 도착한 첫날, 민박집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푸에르토 나탈레스행 티켓을 획득했다. 관광객이 너무도 많아서 매진되었던 노선에 버스가 증편되면서 갑자기 생긴 표였다. 다만, 증편된 버스이다 보니 일정이 좋지 못했다. 버스의 출발 시간이 무려 새벽 5시였고, 밤 12시가 넘어서야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환승도 2번이나 해야 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임시 배차된 버스로 인해 나는 푼타 아레나스에서 다음 버스를 3시간 넘게 기다리게 되었고, 덕분에 푼타 아레나스 시내 구경을 할 여유가 생겼다.
새벽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서둘렀던 일이 생각난다. 하필이면 버스 터미널의 위치를 잘못 알고 있어 엉뚱한 곳에 갔다가 시간에 맞춰 뛰어가느라 식겁했던 것이 기억난다. 5분 정도 늦었는데, 버스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나중에 느낀거지만, 남미에서 이렇게 버스가 늦게 출발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덕분에 놓칠뻔 한 것을 놓치지 않은 적도 많았고.
일단 첫 경유지인 리오 그란데 Rio Grande로 향했다. 우수아이아에서 리오 그란데를 가는 길은 가이드북에 추천이 되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지만, 습기 가득한 새벽 버스에서 바깥 풍경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내 옆자리에는 페루에서 온 할머님이 계셨는데, 처음 탑승했을 때부터 줄곧 스페인어와 영어로 이것 저것 물어보시는 통에 몸짓 발짓 써가며 간신히 대화했던 게 기억난다. 추운 버스에서 담요도 나눠주시고 좋은 분이었다.
담요 속에서 푹 자고 일어나 보니 리오 그란데에 도착했다. 페루 할머님은 이곳에서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여기서 작별 인사를 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푼타 아레나스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육로를 통해 국경을 넘었다. 현재 남미 최부국인 칠레는 미국 만큼이나 세관 검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특히나 북부 지역의 칠레 세관은 통과에만 1박 이상이 걸릴 정도로 악명 높았다. 칠레 세관의 철통 검사의 주역인 검사견은 세관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는데, 세관 마크와 검사 안내표지에 항상 이 개가 등장했다. 그나마 티에라 델 푸에고 지역의 국경 검사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덜 까다로운 편이었다. 보통 검사가 각종 과일, 꿀, 육류의 밀반입을 막으려는 의도이기 때문에, 아마도 인접국의 경제 상황이나 인접지역의 생산물과 관련이 있는게 아닌가 생각했다.
티에라 델 푸에고 지역이 섬이기 때문에, 내륙 지역인 푼타 아레나스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배를 한 번 타야한다. 이 배에서는 핫도그를 파는데 맛있기로 유명했다. 아르헨티나 페소와 칠레 페소를 모두 받는데, 이렇게 둘 다 받는 경우 대체로 아르헨티나 페소를 내는게 이득인 경우가 많았다. 아마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 속도가 너무 빨라 돈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는 탓이 아닌가 싶다. 베네수엘라 정도는 아니지만, 여기도 물가 상승 속도가 상상을 아득히 넘어선다. 여행 당시 1년에 대략 1.5배씩 물가가 오르고 있었으니…
그렇게 12시간 넘게 버스와 배를 타고서야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했다. 푼타 아레나스는 행정구역상 마가야네스 및 칠레 남극 지역 Región de Magallanes y de la Antártica Chilena의 중심 도시이자, 파타고니아 지역에서 3번째로 많은 사람이 모여사는 도시로, 파타고니아 남부 지역의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곳이다. 우수아이아를 비롯한 인근 티에라 델 푸에고 지역의 많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조차 더 값싸고 다양한 물자를 구하기 위해 푼타 아레나스를 방문한다고 한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전자 제품을 사기 위해 꼬박 하루를 소비해 국경을 넘나드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꽤 많다고. 그만큼 칠레가 남미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국가이기도 하고, 한 편으론 아르헨티나가 불안한 국가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주 개인적으로, 여행을 하며 푼타 아레나스란 이름을 자주 듣게 된 경우는 크게 2가지인데, 그중 하나는 펭귄 투어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펭귄 투어를 한다. 우수아이아와 펭귄 투어 경쟁을 벌이고 있는 푼타 아레나스에는 대략 2가지 펭귄 투어가 잘 알려져 있다. 하나는 마젤란 펭귄 투어로, 우수아이아 펭귄 섬에서 살고 있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십만여마리의 마젤란 펭귄이 푼타 아레나스 근처에 살고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이제 우수아이아에도 살기 시작한(?) 황제 펭귄을 볼 수 있는 투어이다. 다만, 이 투어는 이동 시간도 꽤 길고 이들이 모여 사는 지역도 꽤 협소해서 갔다오신 분 말로는 동물원 구경하는 느낌인데 가격은 상당히 비싸다고 한다. 그래서 내 결론은 둘 다 볼 수 있는 우수아이아가 좋다? 사실 매년 황제 펭귄이 길을 잃고 우수아이아로 떠내려간다는 보장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혹은 우수아이아 피나 투르 직원들이 황제 펭귄을 길들여 펭귄 섬에 계속 살게 만들지도 모른다. 사실 푼타 아레나스의 펭귄 관련 업계(?) 종사자들은 아르헨티나 동물들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에 의해 사육된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좁아 터지는 공간에 그 많은 동물들이 바보 같이 모여살리 없다며.
아무튼, 푼타 아레나스의 투어 비용을 정확히 모르겠으나, 양국의 물가 상태를 고려하면 비슷한 투어에 드는 비용은 칠레가 더 저렴할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투어는 대부분 가성비가 떨어지는 편이다. 우수아이아의 펭귄 투어 또한 무려 20만원 가까운 돈이 들지만(!!) 구성이 좋아서 한 번에 다양한 경험이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럽과 북미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우수아이아 펭귄 투어는 남미에서 꼭 해야할 투어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인기가 좋다.
푼타 아레나스라는 이름을 자주 듣게 된 또 한가지 계기는 '남쪽'을 뜻하는 아우스트랄 Austral 이란 이름을 가진 맥주 덕택이다. 칠레의 독일 이민자 호세 피셔 Jose Fischer에 의해 1896년부터 만들어진 아우스트랄 맥주는 칠레 빙하수와 파타고니아 지방의 다양한 재료를 혼합하여 만든 맥주로, 이곳 푼타 아레나스의 전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양조장에서 생산되어 칠레 파타고니아 전역에 팔리고 있다. 아우스트랄은 무엇보다도 마실 때 목넘김의 느낌이 너무나도 훌륭해, 마시는 걸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듯 아우스트랄 맥주를 마시다 몸살난 분도 있었다. 적어도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에서 먹어본 맥주 중에는 가장 맛있었다 (역시 독일의 기술력은 세계 제일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다만, 이 맥주는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에서는 팔지 않고, 칠레 지역에서도 파타고니아 지역 바깥에서는 구하기 힘들고 값도 비싸지기 때문에,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파타고니아 일정을 짠다면 생각보다 먹을 기회가 많지 않다. 칠레 파타고니아 지역을 여행하는 동안 기회가 닿는대로 꾸준히 섭취할 것을 권한다. 한 번이라도 더 마실 수 있을 때 미리 마셔두자.
(출처: 아우스트랄 브루어리 홈페이지)
나는 5가지 아우스트랄을 마셔봤는데, 파타고니아를 상징하는 각각의 이름을 지닌 이 맥주들은 다음과 같다:
(참고로 아래 정보 중 일부는 아우스트랄 공식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아우스트랄 Austral: 라거. 남쪽, 남반구를 의미하는 스페인어. 1896년 당시 호세 피셔가 파타고나 Patagona라는 이름의 양조장을 만들고 처음 선보인 맥주. 파타고나라는 이름은 90년대 말 공장 증설과 함께 아우스트랄로 바뀌었다. 전채요리나 샐러드, 셰비체와 어울림.
야간 Yagán: 다크 에일. 파타고니아 지역 원주민. 비글해협 일대에 정착하여 살아가던, 세계에서 가장 남쪽 지역에서 생존해온 부족. 기름진 고기나 초콜릿과 어울림.
칼라파테 Calafate: 에일.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모레노 빙하가 위치한 지역으로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를 상징하는 곳이다. 색깔이 매우 독특한 맥주이다. 달고 신 음식, 오븐 파스타, 진한 치즈와 어울림.
파타고나 508 Patagona 508: 페일 에일, 여행 당시에는 그냥 파타고나로 불리었는데, 최근 라인업을 정비하면서 508이란 숫자가 붙었다. 아우스트랄 맥주가 탄생한 양조장 주소라고 한다. 구운 고기나 소시지 같은 적당히 기름지고 향이 강한 음식과 어울림.
토레스 델 파이네 Torres del Paine: 헬레스 라거. 푼타 아레나스 인근에 위치한 유명한 국립공원으로 칠레 파타고니아 뿐만 아니라 칠레를 상징하는 관광지이다. 2013년에 라인업에 추가되었다. 기름기 있는 해산물 요리와 어울림.
그리고 2018년에 한 가지 아우스트랄 맥주가 라인업에 추가되었다:
리바르보 Ruibarbo: 한국에서는 루바브로 불리우는 시베리아가 원산지인 식물로, 추운 파타고니아 남부 지역에서도 잘 적응한 파타고니아의 대표 식물. 아우스트랄 맥주와 마찬가지로 칠레 파타고니아 지역의 이민 역사의 상징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햄버거나 샌드위치, 특히 크림과 치즈가 올라간 흰살 생선 음식과 어울림.
이 6가지 맥주의 알콜 도수는 토레스 델 파이네(6.1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7도로 맥주치고는 꽤 높은 도수를 갖고 있으며, 파타고니아와 연관된 이름으로 부터 연상할 수 있는 파타고니아의 맛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칼라파테의 경우 칼라파테 지역에서 생산되는 베리의 맛이 맥주 끝에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무난하고 괜찮은 건 토레스 델 파이네, 가장 독특하고 예상 밖에 맛있던 건 칼라파테였다. 칼라파테는 분명 첫 맛은 에일인데 다 마시면 에일이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푼타 아레나스에 대한 한국에서의 인지도를 생각해보면, 무한도전 덕분에, 지금의 푼타 아레나스는 남극 탐험 기지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탐험 대원들의 끼니를 해결해주는 신라면을 파는 가게가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있다. 마침 푼타 아레나스에서 여유가 생긴 만큼 신라면 가게를 방문해보기로 했는데, 라면 값을 내려면 칠레 페소가 필요하니 일단 칠레 페소를 뽑을 은행 ATM을 찾아 나섰다.
사실 라면값도 라면값이지만, 푼타 아레나스가 당분간 방문할 도시 중 가장 큰 칠레 도시였고, 이만큼 안전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기 힘들기 때문에, 이곳에서 칠레에서 사용할 돈을 최대한 많이 뽑는 것이 목표였다. 출금의 경우, 카드 제휴 회사의 ATM이면 수수료를 부담하고 어디서든 출금가능하지만, 칠레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은행은 방코 에스타도 Banco Estado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귀국 후 한국에서 본 칠레 영화 ‘네루다’의 스폰서가 이 회사였다.) 왜 방코 에스타도가 여행객들 사이에서 유명하냐면, 무엇보다도 인출 가능한 금액의 한도가 다른 은행의 5~6배 정도 되기 때문이다. 인출을 끝내고 건물을 나서는데, 갑자기 왠 칠레 청소년이 나타나서 내가 인출한 기기를 뒤적이다 사라졌다. 차를 타고 떠날때 내 눈을 마주쳤는데,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남미는 카드 복제나 비밀번호 유출이 워낙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인출 시 비밀번호 입력 화면을 손으로 가릴 것을 매우 강조했다. 마침 내가 깜빡하고 손으로 가리지 않았고, 인출이 끝나자마자 청소년이 나타났다는 인상을 강했다. 복제가 어려운 IC카드로 인출을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하긴 했으나, 한동안은 통장의 돈이 갑자기 빠져나가는지 계속 확인하며 지내야 했다.
얼마 간 ATM 주변을 서성이며 그 청소년이 다시 오는지 살피다가, 상황이 끝난 것 같아 은행 건물을 빠져나왔다. 마침 버스 환승 시간이 3시간 정도 남았고, 여름의 남쪽 땅끝 마을은 백야로 인해 밤보다 낮이 훨씬 길었다. 미리 파악해둔 라면 가게의 위치가 버스 터미널에서 멀지 않아서, 도시 구경을 조금 하다가 라면 가게를 찾아갔다.
마침 가게에는 사장님 뿐 아니라, 아마도 TV에 나왔을 아들 중 한 명과 그 친구, 그리고 사장님의 학창 시절 절친 부부가 와있었다. 아우스트랄 캔 맥주를 마시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잘못 주조된 칠레 페소에 얽힌 이야기를 비롯해…어떨결에 옆에 있던 내게도 맥주 한 캔과 안주 이것 저것을 나눠주셨다.
가게 안에는 갖가지 한국인들의 흔적이 가득했는데, 특히나 인상깊었던 것은 내가 곧 방문할 예정인 토레스 델 파이네에 관한 설명이었다. 미리 겁을 많이 먹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엘 핑기노 El Pinguino 라는 이름의 푼타 아레나스 지방 신문도 보였다. (핑기노는 펭귄의 스페인어 표현이다. 즉 펭귄신문)
여행기를 작성하며 번역기를 돌려보니 코카인을 콘돔에 숨기고 있던 승객이 체포되었다는 얘기었다...
사장님 말로는 얼마전부터 한국에 있던 남은 가족들도 모두 칠레로 넘어와서 생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사장님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같은 고향 같은 나이라고 했다. 말인 즉, 대구 출신에 우리 부모님과 나이까지 같았다. 내가 대구 출신이라고 했더니 ‘대구 출신 특유의 성격이 아닌데?’라고 했다. 서울 생활하면서 꽤 많이 들은 말 가운데 하나이긴 한데, 대륙 끄트머리까지 와서도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기분이 묘했다.
라면을 다 먹었을때즘, 우수아이아에서 같이 묵었던 부부 여행자 분들이 라면 가게로 들어왔다. 앞서 얘기했던 ‘아우스트랄을 폭주하듯 마시다 뻗어버렸다’는 분이 바로 이분 가운데 한 분이셨다. 아우스트랄 후유증(?)으로 우수아이아에서 줄곧 휴식을 취하셨는데, 숙소에서 헤어진지 이제 하루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너무 반가워서 격한 인사를 나누고, 나와 부부의 인연을 사장님께도 얘기했다. 마침 버스 시간이 다 되었고, 사장님과 기념사진을 찍고 부부분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가게를 나왔다.
푸에르토 나탈레스행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돌아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수아이아에서 구하지 못했던 ‘푸에르토 나탈레스 출발 - 엘 칼라파테 도착’ 버스표가 있는지 확인했다. 표가 없다면 내 일정을 전체적으로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원하는 날짜에 버스가 증편되어 새로운 표가 생겼다. 적어도 바릴로체까지는 가는데에는 문제가 없겠구나라는 생각에 기뻐하며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향하는 2층 버스에 탑승했다.
3. 푼타 아레나스, 끝.
참고: 신라면 가게 주소
칠레 Región de Magallanes y de la Antártica Chilena, Punta Arenas, Mejicana, 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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