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파타고니아 지역에서의 일정이 마무리되고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데 칠레 Santiago de Chile (이하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일정을 짤때, 여행의 목적이었던 파타고니아 일정을 마무리하고 산티아고에서 조금 쉰 후,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San Pedro de Atacama 와 우유니 Uyuni, 라 파스 La Paz 여행을 계획했다. 남반구에 위치한 남미지역의 여름은 12월부터 2월까지 계속되며 이 기간 동안 상대적으로 적도에 가까운 지역에서 우기가 진행된다 한다. 론리플래닛 같은 서양의 유명한 여행 가이드북에서는 우기 동안의 남미 여행을 추천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비구름이 많아 해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나 볼리비아 인근의 페루에서는 마추픽추를 볼 확률이 더 낮아진다. 그러나 한국인을 포함한 많은 동양인들은 이런 우기 시즌에 맞춰 우유니 소금 사막 지역을 방문한다. 우기로 인해 사막에 물이 가득차게 되면, 끝없이 펼쳐져 있는 황폐한 소금 지대가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타카마와 우유니, 라 피스 지역은 대부분 3000m가 넘는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몸 관리에 신경써야 했다. 그래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자 산티아고의 휴식 기간을 잡았었는데, 그 기간마저 코이아이케에서 소비해버린 탓에 산티아고는 저녁만 먹고 떠나는 도시가 되어 버렸다. 다음날 비행기도 새벽 출발이였기 때문에 처음엔 공항에서 노숙이나 하며 돈이나 아껴볼까 했다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잠깐 동네 구경도 하고 오랜만에 한식이나 먹어볼까 하는 생각에 민박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사실 한식 안먹어도 여행하는데 큰 지장은 없는 성미지만, 그래도 가끔 먹어서 나쁠 건 없다.
내가 최남단 지역을 경유하여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페루나 볼리비아 지역에서 산티아고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이동하는 일행들을 자주 마주쳤다. 그들과 함께, 서로 보지 못한 것들 - 나는 남쪽에서 본 것들을 얘기해주고, 그들은 북쪽에서 본 것들은 얘기해준다 - 에 대해 얘기를 하다보면 꼭 나오는 얘기가 남미의 치안 문제였는데, 파타고니아 지역에 비해 북쪽에 위치한 나머지 지역의 치안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 산티아고에 그렇게나 소매치기가 많다며 특히 출퇴근길 지하철 환승 구간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걱정이 되어서 민박집 주인누님(꼭 누나라고 불러달랬다…)께 말씀드렸더니 오는 날짜가 평일이고 시각도 한창 일과 중일 때라 그나마 좀 안전할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주인누님의 말씀대로, 내가 도착한 시간대에 산티아고 지하철 역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운 좋게도, 별 일 없이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는 저녁 시간 전까지 근처 관광지를 돌아볼 겸 급히 문 밖을 나섰다. 숙소에서 받은 근처 관광지도를 바탕으로 산 크리스토발 언덕 Cerro San Cristóbal과 아르마스 광장 Plaza de Armas 방문을 위한 동선을 짜고 지도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산 크리스토발 언덕을 빠르고 쉽게 올라가기 위해서는 저 성 안에 있는 텔레페리코를 타는 게 좋다.
본래 이곳에 살던 인디오 부족 케추아 Quechua에 의해 ‘신의 장소 God of Place’란 뜻의 투파우에 Tupahue란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후에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conquistador (정복군)에 의해 성인 크리스토포로스의 이름을 갖게된 산 크리스토발 언덕은 정상까지의 높이가 300m 밖에 되지 않는 동네 뒷산 같은 곳이지만, 상대적으로 산이 드문 산티아고에서는 랜드마크로 통한다. 1903년 밀스 천문대가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게 되었다는 이곳은, 브라질 히후 지 자네이루 Rio de Janeiro의 크리스투 헤덴토르 Cristo Redentor 수준에는 못미치지만 정상에 우뚝 솟아있는 높이 22미터의 대형 성모 마리아 상으로 유명하다. 케이블 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면 인구 700만이 넘는 대도시 산티아고가 눈 앞에 펼쳐진다.
크리스투 헤덴토르를 상상하고 가면 크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칠레 총 인구가 1800만여명인데, 산티아고와 그 인근에만 700만명 가까이 살고 있다.
산 크리스토발 언덕을 내려와 산티아고 역사의 중심으로 향한다. 플라사 데 아르마스, 즉 아르마스 광장이란 이름에서 아르마스는 영어로 Arsenal, 즉 무기고를 뜻한다. 진짜 무기고가 있었던 광장을 뜻하기 보다는, 승전 시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한 행진의 광장이자, 패전 시 최후의 피난처로써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군사력을 집중시키는 장소였다고 한다.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페루의 수도 리마를 건설한 정복군 프란시스코 피사로 곤살레스 Francisco Pizarro González의 부관이자, 칠레의 초기 총독 페드로 데 발디비아 Pedro de Valdivia는 칠레에 건설한 최초의 식민지에, 그리스도 12 사도 중 한 명인 성 야고보 St. James의 이름과, 자신의 고향인 스페인 서부 도시 에스트레마두라 Extremadura의 이름을 남기고자 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산티아고 데 라 누에바 엑스트레마두라 Santiago de la Nueva Extremadura, 즉 새로운 에스트레마두라의 산티아고라는 지명이 탄생하게 되었고, 지금의 산티아고 데 칠레라는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
스페인 정복군 식민지의 전형적인 도시 설계 방식인 ‘로마식 도시 계획’에 의해, 산티아고의 텅 빈 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성당, 정부 건물, 기타 문화적 정치적 주요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때 이 텅 빈 광장이 바로 아르마스 광장이었다. 실제로 스페인 식민지였던 많은 남미의 도시들에는 지금도 플라사 데 아르마스나 플라사 마요르 Plaza Mayor (대중 광장), 혹은 엘 소칼로 El Zócalo나 파르케 센트랄 Parque Central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여러 주요 건물에 둘러싸인 중앙 광장의 도시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파란불일때 신호등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꼭 보길 바란다.
이제 아르마스 광장은 여가와 관광의 중심지가 되었다. 체스를 두는 할아버지를 비롯해 공연을 펼치는 젊은이들의 모습까지, 칠레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다만, 그런 모습에 넋을 놓고 있으면 소매치기에 의해 얄짤없이 가방이 열리고 빈털털이가 되기 십상인 곳이기도 하다. 아르마스 광장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돗자리를 펼쳐 놓고 각종 물건들을 파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이들이 소매치기로 획득한 물건을 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미의 대도시에서는 이런 소매치기 물건을 거래하는 곳이 존재하곤 하는데, 어쩌면 자신이 소매치기 당한 물건을 이런 곳에서 되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산티아고에서는 소매치기한테 털릴지도 모른다.
남미 지역 대부분이 소매치기에 대해 죄악으로 여기기 보다는 능력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한 편이란 인상을 받았다. 지역으로 따지자면, 유럽과 북미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파타고니아 지역은 다른 남미 지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었고, 특히 우수아이아는 식탁에 지갑을 올려놓고 밥을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꽤 안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라 단위로 보면, 남미 내에서 총기 소지가 금지된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인 칠레가 우루과이, 쿠바와 함께 치안이 나쁘지 않은 편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시 좀도둑은 많다.
소매치기도 그렇고 도시 전체적인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이곳이 세계은행에 의해 선진국으로 분류되고 남미 최초로 OECD에 가입한, 1인당 국내 총생산 2만 달러가 넘는 나라가 맞나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칠레는 구리를 중심으로 한 광물업을 통해 발생시킨 막대한 수출을 바탕으로 다른 남미 지역보다 2배 가량 빠른 속도로 성장해왔다. 최근에는 구리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스타트업과 IT산업 유치를 위한 투자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로 인해 글로벌 IT회사의 남미 지사 대부분이 칠레 산티아고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경제 수준 또한 무시할 수 없는데, 경제 자유도 순위에서 매년 상위 10위(2017년 기준 10위. 한국은 23위인데, 미국(17위)과 일본(40위)을 보면 이것도 결코 낮은 등수는 아니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노동자 인권 관련 항목 점수가 낮은 편으며, 이는 현재 국가 정책의 변화 방향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안에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빈부 격차를 겪고 있으며 가계 부채 역시 남미 지역 전체에서 가장 심각한 국가이기도 하다 (다만, 이렇게 심각한 칠레의 가계 부채 비율이 한국의 절반도 안된다.)
이렇게 극단적인 경제 성장을 겪게 된 것은 칠레의 어두운 역사와 그 과정에서 집행된 특유의 경제 정책의 영향이 큰 듯 하다. 1973년, 칠레에서 발생한 쿠데타는 산티아고를 피바다로 만들고, 당시 대통령이던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스 Salvador Allende Gossens는 자살하고 만다. 아옌데의 절친이자 아옌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던 노벨문학상 수상자, 시인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는 망명을 추진하던 도중 피살당하기에 이른다.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키고 쿠데타를 일으킨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Augusto José Ramón Pinochet Ugarte는 이후 독재정권을 설립하게 된다. CIA까지 개입시킬만큼 남미의 사회주의를 잠재우고 싶었던 미국과 소외계층의 지지를 받던 아옌데 정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칠레 기득권층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이들의 도움을 받아 정권을 장악하게 된 피노체트는 시카고 학파 출신의 경제학자들을 경제분야 관료로 영입하게 되고, 이들로 부터 설계된 경제정책을 통해 칠레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무대가 된다.
비운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외과의사 출신으로 사회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었다.
그의 개혁은 실패했으나, 그는 지금도 칠레에서 가장 위대한 칠레인으로 남아있다.
(사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Salvador_Allende)
칠레의 국민 시인이자 정치인이었던 파블로 네루다
얼마전까지도 그의 사인은 전립선암이었으나 지난해(2017년) 10월, 그가 실제로 사망한 것은 병원에 입원한 직후였으며, 암이 사인이라기에는 그의 사망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진행되었음이 밝혀졌다. 실험실에서 배양된 박테리아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주입된 것이 사망의 원인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지금도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Pablo_Neruda)
칠레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그에 관한 정보들을 찾다보면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역사가 지구 반대편에서도 벌어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Augusto_Pinochet)
전세계 생산량의 35%를 차지하는 구리 수출을 중심으로한 민영화와 규제 철폐, 무역장벽 완화는 경쟁을 야기하여 경제를 급격히 성장시켰으나, 이를 극단화시키기 위해 공공 부문 지출을 줄이고 복지정책을 축소시켰고, 의료와 교육 분야의 민영화와 이로 인한 복지 부실은 소득 분배의 문제를 야기함으로써 삶의 개선과 국가의 성장 사이의 큰 괴리감을 발생시켰다. 경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비값이 온전히 총생산으로 환원될 수도 있지만 경쟁은 로비나 담합과 같이 실질적인 삶의 개선에 불필요한 비용 소비를 만들 수 있으며, 이로 인한 국가 총생산 증가는 국가 구성원 개개인의 체감할 수 있는 경제 발전에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음이 칠레 경제에서 드러난 자유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칠레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급격한 성장 이후, 소득 재분배를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독재 시절 뿌리 내린 신자유주의식 정책들은 그 잘못된 당위성이 고정관념 처럼 깊게 자리 잡고 있어 칠레를 전세계에서 대학 교육비 부담이 가장 심각한 국가로 만들었고 심각한 의료계급화를 야기했으나, 이들 문제에 대해 여전히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네루다 타살을 비롯, 독재 시절 피노체트의 악행이 지금도 끊임없이 밝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비밀 경찰인 ‘국가정보국 (DINA)’을 창설한 피노체트는 망명 온 나치 전범들을 국가정보국에 소속시켰고,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사람들을 끔찍한 방법 - 강간, 고환 터뜨리기, 죽은 동료들의 인육을 먹이기, 손발톱 뽑기 등 -으로 고문하고 살해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피노체트 정권 당시 실업률이 급격히 줄어들긴 했으나, 칠레 국민들의 실질 임금은 통계상으로는 정체 수준에 가까웠다고 알려져있고, 삶의 수준은 경제 성장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피노체트가 위대한 영웅인지, 시대를 위해 소비된 국민들이 영웅인지 (혹은 안토파가스타에서 채굴되는 엄청난 구리 광물이 영물인지)에 대한 논쟁은 안타깝게도 영원히 지속될지 모르겠다. 지금도 칠레에는 급격한 경제 성장의 결과물을 바라보며, 피노체트의 독재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과, 피노체트 정권으로 부터 잉태된 여러 정책들의 부정한 씨앗들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지금의 젊은이들 간의 극심한 세대차이가 남아있다고 한다. 산 크리스토발 언덕을 내려와 아르마스 광장으로 향하는 동안 마주한 산티아고의 퇴근 행렬, 그들의 표정과 발걸음 또한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사람 사는 곳은 참 비슷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 사람 사는 곳이다.
- 11. 산티아고, 끝.
산 크리스토발 정상에서 발견한 표지판. 라파 누이 Rapa Nui가 표시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이스터 섬 Isla de Pascua' 이란 이름의, 고대 역사를 간직한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한 편으로는 칠레의 식민지로써, 끊임없는 수탈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며, 지금도 칠레로 부터 독립하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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