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일정에도 없던 코이아이케를 방문한 것이기 때문에 숙소도 예약하지 못했다. 버스 정류장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작은 사무실에서 나와 무작정 숙소를 찾아다녔다. 사실 숙박업체가 몰려있는 지역이 따로 있었는데, 정보 부족 탓에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버스 정류장과 시내 근처를 1시간 정도 배회하며 ’Hostal’이란 팻말이 붙은 문을 수차례 두드렸다. 벨을 눌러도 인기척 없던 어느 집 앞에서 포기하며 뒤돌아선 순간, 갑자기 옆집 마당의 아주머니께서 방을 구하냐는 듯 짧은 영어로 물어보았다. 얼떨결에 들어간 곳에는 외국인 2명이 앉아 있었고, 그 중 스페인어를 잘 하던 미국인이 아주머니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미국인은 여기가 좀 비싸긴 해도 집도 깨끗하고 아주머니께서 너무나도 친절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인터넷이 진짜 빠르다며 엄지척을 했다. 그 얘길 듣고 나도 엄지척을 하며 여기 머물겠다고 했다.
꽃집을 겸하던 이곳 민박집은 꽃과 화분, 각종 풍경화, 오래된 가구와 식기들로 장식되어 소소한 듯 고풍스럽고 근사한 느낌을 자아냈다. 아주머니께서는 나에게 하루씩 번갈아 가며 자라며 침대 2개짜리 방을 내어 주었고 점심 식사 겸 환영 파티에 초대해주셨다. 직접해주신 다양한 요리를 민박집 식구들 모두와 함께 했는데, 고수 샐러드를 주면서 동양인들 이거 잘 먹지 않느냐라고 챙겨주셨던 게 기억난다. (나는 동양인 중에 한국인은 못먹는 음식이라고 설명했지만 너무 배가 고파 열심히 먹었다:) 처음 만났던 분 말고도 실질적인 대장이 아닐까 생각되던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 역시 정말 친절하셨다. 유럽 영화에 나올법한 곱상하고 기풍있는 외모를 가진 백인 할머니께서 입으로 ‘츠츠츠츠’라는 소릴 내시시면서 이런저런 집안일을 혼자 해내시는데, 차를 내어주시거나 설거지를 대신 해주시고, 내 속옷과 양말을 공짜로 빨아서 건조까지 해주셨다.
칠레의 대표적인 암벽등반지인 마카이 산 Cerro Mackay의 기괴한 암석 장벽 아래에 위치한 코이아이케는 다른 칠레 도시들에 비해 비교적 형성된지 얼마되지 않은 도시로써,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 위치한 탓에 20세기 중반까지도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1988년 카레테라 아우스트랄 도로 개통과 함께 지역 중심도시로 성장했는데, 생각보다 잘 갖춰진 도시일 뿐 아니라 리오 트란킬로와 인근의 쎄로 카스티요 국립 보존지역을 포함, 중부 파타고니아 관광의 중심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며 칠레 현지인들만의 시골 휴양지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묘하게 동양인을 신기해하는 늬앙스를 많이 받았다. 사진을 같이 찍자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리오 트란킬로행 버스표를 구하고 도시를 구경하는 동안 차별적인 늬앙스나 제스쳐보다는 시골 인심 비슷한 친절함을 많이 느꼈다.
나와 같이 사진을 찍었던 커플의 모습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관광버스를 타고 리오 트란킬로로 향했다. 버스 창 밖으로 파타고니아에서 자주 보던 꽃들을 다시 볼 수 있었고, 멀리 쎄로 카스티요의 웅장한 모습도 구경할 수 있었으며, 죽음의 숲 Bosque Muerto을 지나는 동안 무수한 나무들의 시체를 지켜보기도 했다. 가는 도중에 도로가 막혀서 1시간 넘게 도로 위에 서 있었는데, 기사님의 엄청난 운전 실력(과 과속) 덕분에 리오 트란킬로 도착 시간은 30분 밖에 늦지 않았다.
쎄로 카스티요. 가까이 가면 산봉우리 아래에 아름다운 호수를 볼 수 있다.
이렇다고 한다. (출처: http://www.curiositytravels.org/day-hike-in-cerro-castillo-laguna/)
죽음의 숲. 1990년 허드슨 화산의 폭발로 인해 수많은 나무가 불타고 남은 흔적이라고 한다.
대리석 지형 구경을 위한 제트 보트 탑승을 위해 줄을 서 있는 동안 어떤 칠레 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산티아고에 사는 엔지니어인데 여름 휴가 기간 동안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가장 날씨가 좋을 때 대리석 지형을 보고자 코이아이케에서만 10일 정도 머물면서 가장 맑은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햇빛에 의해 반짝이는 푸른 호숫빛이 대리석에 비치며 일렁일 때의 그 설명하기 어려운 풍광을 직접 보기 위해서라면 며칠을 낭비해도 아깝지 않다는 말이었다. 나에게 정말 운이 좋다고 말하면서, 이제 소원 성취했으니 며칠 뒤 남부 파타고니아로 이동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이날 리오 트란킬로의 날씨는 파타고니아 답지 않게 정말 맑았지만 바람은 꽤 강한 편이었다. ‘고요함’을 뜻하는 트란킬로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리오 트란킬로에서 마주한 헤네랄 카레라 호수는 파도가 칠 정도로 요란하게 출렁거렸다. 전세계적인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 페이스 North Face의 창업주 더글라스 톰킨스 Douglas Tomkins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바로 그 파도이다. 동료들과 함께 리오 트란킬로에서 카약을 타던 더글라스는 헤네랄 카레라 호수의 파도에 카약이 뒤집히는 사고를 당했고, 차가운 호수물 속에서 저체온증에 빠져 사망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은 그를 ‘낙원을 지키고 싶었던 사업가’라고 칭했다. ‘파타고니아’라는 낙원을 지키기 위해, 그는 칠레 정부의 허락을 받아 중부 파타고니아 지역을 매입했다. 기증을 약속했지만 타지에서 온 억만장자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던 칠레 정부는 군부대를 보내 매입된 지역을 감시했다. 수십년에 걸친 환경 복원 작업과 시설물 설치 작업을 거쳐 공원화된 지역은 그대로 칠레 정부에 기증된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대표적인 공원이 풀마린 국립 공원과 코르코바도 국립 공원이다. 그는 자신이 복원한 공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환경 보존과 복원의 중요성을 체득하길 바랐다고 한다. 실제로 풀마린 국립 공원에서는 환경 복원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에도 파타고니아 지역의 복원 사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2017년 3월 18일, 1백만 에이커 규모의 지역이 추가로 기증된 풀마린은 남미 최대 규모의 국립 공원이 되었다. 기증식이 진행된 날, 그의 오랜 친구이자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창업자 이본 쉬나드 Yvon Chouinard는 더글라스 톰킨스보다 더 많은 야생 보호 지역을 만든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수 만년 동안 파타고니아의 중심지에서 숨쉬어 온, 깊이 500미터가 넘는 영롱한 호수에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운명적으로까지 느껴진다.
이본 쉬나드(오른쪽)와 더글라스 톰킨스
(출처: https://www.cntraveler.com/stories/2015-12-09/north-face-co-founder-douglas-tompkins-dies-in-kayaking-accident)
헤네랄 카레라 호수의 파도
고요한 항구 마을의 아름다운 호수에 몰아치는 거친 파도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마블 투어를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어 갔다. 내가 탑승하게 된 제트 보트에서, 아까 만났던 칠레 분과는 다른, 처음보는 칠레 대가족을 만나게 되었는데, 탈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유쾌한 가족들이었다. 다 같이 사진도 찍고 물장난도 치면서 즐거운 투어 시간을 보냈다. 보트 바닥에는 플라스틱 컵들이 놓여있었는데, 투어 도중 가족 중 가장 장난스러운 남성 분이 컵으로 호수물을 떠다 나에게 주면서 ‘아구아 돌세 Agua Dolce’라며 마시기를 제촉했다. 아무리 ‘물’이라지만 엄연히 석회수이기 때문에 먹고 탈이 나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지만,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한 잔 쭉 들이켰다. 그러고는, 비어있던 컵을 다시 호숫 물로 채워 바로 뒤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께 전달하며 ‘아구아 돌세’라고 말했더니,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예상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대리석 지형을 감상하며 눈은 눈대로 호강했고 가족들 덕분에 분위기는 분위기대로 좋았다. 투어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바람이 더 강해져 보트가 뒤집어질 듯 튀어 올랐다. 잠깐이긴 하지만, 혹시나 이곳에서 나도 파타고니아와 함께 여행을 끝내게 되는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갈 정도였다.
다행히도 투어는 무사히 끝났고, 가족득과 함께 Bien, Bien을 외치면서 헤어졌다. 다행히 내 위장은 석회수 한 컵에 담겨있던 이질적인 성분들을 버텨주었고, 덕분에 코이아이케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버스가 사람을 한 가득 태운 채로 카레테라 아우스트랄의 험난한 길을 질주하는 동안, 매일 이런 식으로 손님들을 실어나를 버스 기사 아저씨가 꽤나 많은 돈을 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에 있었던 도로 문제 탓에 예상보다 늦게 귀가했다. 한국서 가져온 마지막 전투식량과 컵라면을 먹으며 식당에서 배를 채우고 있는데,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던 곱상하신 할머니께서 나타나셨다. 그러고는 내 저녁이 부실해 보였는지 먹다 남은 거라며 치즈랑 빵, 햄 등을 꺼내주었다. 치즈는 코이아이케 지역에서 직접 만든 것이라고 했는데 그 깊은 맛이 정말 감동스러웠다. 페로 Pero를 보았냐면서, 거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을 가리켰다. 벽에 걸려 있던 풍경화에는 코이아이케에 머무는 동안 볼 수 있었던 주변 풍경들이 담겨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헤네랄 카레라 호수 한쪽에 위치한 강아지 모양의 대리석 바위 그림이 있었다. 카메라를 가져와 투어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 드렸더니 여기엔 페로가 없다고 그러시면서, 이걸 못봤으니 제대로 구경하고 온 게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다음에 페로를 보러 오겠다고 말했더니 할머니께서 웃으셨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음날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문 밖을 나섰다. 발마세다 공항으로 가는 밴을 타려는데 2층 창문을 통해 할머니께서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칠레 할머니께 손을 흔드는 동안, 어릴때 같이 살며 가끔씩 밥도 해주시고 마중도 나와주시던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그렇게 파타고니아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말한 대리석 강아지를 만나기 위해, 언젠가 다시 한 번 코이아이케에 가야겠다.
- 10. 코이아이케, 끝.
- 마블 투어 관련 자세한 사진과 영상은 '(3) 마블 투어 특집편'에 실려 있습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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