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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Patagonia, and more

12. 아타카마 Atacama (1)


칼라마 Calama로 향하는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일찍 짐을 싸고 우버 Uber로 택시를 호출했다. 우버를 써본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일단 이런 새벽시간에도 우버 알바를 뛰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 놀라웠고, 우버 택시 경쟁 덕분에 예상보다 저렴하게 공항까지 이동할 있었던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렇게 새벽 비행기를 타고 북쪽으로 날아가 안토파가스타 Antofagasta 주의 대표 도시인 칼라마에 도착했다. 모레노 빙하의 차가운 바람을 자켓으로 막아내던 것이 엊그제인데, 이제 칼라마의 황량한 사막 지대에서 불어온 모래 바람이 몸을 때리고 있다


칼라마는 칠레 내륙에서 아타카마 Atacama 지역으로 넘어가기 위해 거쳐가게 되는 가장 알려진 도시이다. 칼라마와 아타카마가 속한 안토파가스타 주는 칠레 북부의 대표적인 국경지대로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와 마주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 아타카마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바로 유명한 우유니 소금사막 Salar de Uyuni  독특한 야생 환경이 보존되어 있는 에두아르도 아바로아 안데스 지역 야생 동물 국립 보호 지역 Reserva Nacional de Fauna Andina Eduardo Abaroa (이하 에두아르도 지역) 위치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에서 아타카마로 넘어가는 구간에는 화산과 협곡 지형, 와인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북부의 관광지 살타 Salta 자리잡고 있다. 이들 모두 안데스 산맥의 고산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들이다.


살타는 아르헨티나 북부의 대표적인 관광도시이며, 멘도사 Mendoza, 산 후안 San Juan, 라 리오하 La Rioja, 카타마르카 Catamarca, 리오 네그로 Río Negro 와 함께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이다. 사진은 살타 인근에 위치한 대표적인 관광지 카파야테 Cafayate

(출처: https://www.getyourguide.co.kr/salta-l1153/cafayate-fd-tour-from-salta-t57637/?utm_force=0)


다만, 만약 누군가 이들 지역을 번에 여행하고자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아르헨티나에서 칠레 지역으로 넘어가는 것은 피하길 권한다. 일전에 설명했듯이 칠레 국경 검문은 다른 남미 국가에 비해 매우 엄격한 편이며, 특히 관광객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남부 지역에 비해, 외국인 노동자의 비율이 높은 북부 지역의 검문은 팍팍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다 보니, 국경을 통과하는데 있어,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로 넘어가는 보다 아르헨티나에서 칠레로 넘어가는 것이 시간과 수고가 많이 드는 편이다


안토파가스타 지역은 칠레 경제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1970~80년대 피노체트 Pinochet의 독재 시절 칠레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자원을 극적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고, 결국 이곳은 칠레가 남미 최고의 선진국이 되는데 역할을 했다. 지금도 칠레 수출의 50% 이상이 안토파가스타 지역에서 생산된 구리와 각종 천연 자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노동력이 부족한 탓에, 칠레 정부는 주변 국가로 부터 노동자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민과 난민 수용에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다. 안토파가스타 주의 주도인 안토파가스타는 이제 칠레 제 2의 도시로써, 칠레에서 3번째로 많은 인구 (40만)가 살고 있고, 칠레에서 가장 소득 수준이 높은 도시가 되었다.


안토파가스타 주의 주도, 안토파가스타 (출처: https://es.wikipedia.org/wiki/Antofagasta)


그렇게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부가 쌓여가는 동안, 칼라마를 포함한 안토파가스타의 주요 도시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칼라마는 칠레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하나가 되어 갔다. 한때는 칼라마의 버스 터미널을 거쳐 아타카마로 이동하는 것이 칠레 여행에서 가장 난이도 높은 구간이기도 했다. 집시 무리들이 칼라마 곳곳을 몰려다니면서 여행객들을 위협하고 금품을 갈취했다. 결국 돈이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곳이 것이라며, 남미에 거주 중인 분께서 말씀해주셨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곳 안토파가스타가 한때는 볼리비아의 영토였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한 직후, 칠레 정부는 안토파가스타의 건조하고 황량한 소금 사막지대인 아타카마를, 내륙에서 바닷가로의 접근을 방해하던 요소로 생각했고, 지역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한 볼리비아가 바닷길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당시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칠레와 볼리비아 간의 국경이 완전히 합의된 상태는 아니었다고 하며, 비록 칠레 정부의 관심이 적었을지는 몰라도 이미 지역은 칠레인들에 의해 개척이 진행 중이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버려진 땅에서 초석과 과노 Guano라는 광물이 대량으로 매장되어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화약의 재료였던 초석과 농작물의 비료로 쓰이던 과노에 대해, 당시 유럽 선진국들의 수요가 굉장했다고 하며 자연스럽게 볼리비아와 칠레는 각각의 방식으로 안토파가스타 지역으로 부터 이권을 챙기고자 했다. , 볼리비아는 이곳 지역에 대한 영토 소유를 통해, 칠레는 이곳 개발을 주도해 칠레인들로 부터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부를 잠식하려 했다. 처음 몇해 동안은 서로 간의 합의를 지키면서 문제 없이 이권을 나눠가졌으나, 양국 모두 재정 위기에 빠지게 되고 아타카마 사막으로 부터 많은 이득을 취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힘의 균형은 무너지게 된다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볼리비아는 아타카마 사막에 대한 개발 운영권을 칠레인들로 부터 회수하여 국유화함으로써 재정을 충당하고자 했고, 아타카마 사막 개발을 통해 재정을 충당해온 칠레는 이에 반발했다. 여기에, 칠레를 통해 수요를 충당해온 유럽 국가들까지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대한 이권 개입을 시도한다.


결국 유럽의 지원을 등에 업고, 칠레가 안토파가스타를 침공하여 항구를 점렴하게 된다. 이에 볼리비아는 비밀 군사 동맹을 맺은 이웃국가 페루에게 참전을 종용하게 되는데, 칠레 국경 인근의 타라파카 Tarapacá 주에서 엄청난 자원을 발견한 페루는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고 타라파카 주의 자원을 국유화하여 부족한 재정을 만회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비밀 군사 동맹의 비밀을 스스로 실토할 정도로 자신들의 난처함을 칠레에 알리고자 했지만, 결국 군사 동맹 조약을 따르고 볼리비아를 돕기로 결정한다. 칠레 내부에서는 페루와 볼리비아 간의 비밀스런 관계가 국가적인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칠레가 페루-볼리비아 동맹에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태평양 전쟁’ (War of the Pacific) 발발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는 지금까지도 남미 대륙의 국경지대 곳곳에 남아있다


남미에서 벌어진 태평양 전쟁은 칠레의 승리로 끝난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B9%A0%EB%A0%88)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한때 페루 수도인 리마 Lima까지 함락시키며 페루 전역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이후 협정을 통해 아리카 일부 (현재 지명: 아리카 파리나코타 Arica y Parinacota) 타라파카 Tarapacá , 그리고 볼리비아로 부터 빼앗은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영유권을 확보했다. 엄청난 자원을 확보하게 칠레의 세수는 종전 직후 4배가까이 뛰어올랐다


비록 수도를 잠시 빼앗겼으나 종전 협상 과정에서 대부분의 영토를 보전 받은 페루는 이후 에콰도르와 콜롬비아를 상대로 벌인 전쟁을 통해 아마존 유역 일부를 확보하며 국력을 어느정도 회복했다. 하지만 볼리비아는 도저히 회복할 없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볼리비아의 험준한 지형 탓에, 안토파가스타를 점거한 해안 지역을 따라 페루의 수도까지 점령했던 칠레군은 더이상 볼리비아의 수도로 진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안토파가스타를 빼앗긴 볼리비아는 완전한 내륙국가가 되어버리고 만다. 국토의 상당 부분이 험준하고 사람이 살기 힘든 고산지대로 이뤄진 볼리비아로써는 바다와 맞닿아 있는 안토파가스타가 너무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여전히 볼리비아에는 엄청난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으나 이를 국외로 내보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연히 볼리비아는 남미 최빈국이 되어 버렸다. 결과론적이지만 칠레 GDP 절반 이상이 안토파가스타에서 나온다는 것을 고려했을때, 절반을 볼리비아의 GDP 포함시키면 볼리비아가 칠레보다 사는 나라가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빠르게 평화 협상을 진행하며 종전을 선언한 페루와는 달리, 페루-칠레 평화협정 이후 반년 정전 협약만 맺은 볼리비아는 이후 20 동안, 안토파가스타 지역을 공식적으로 양도한다는 내용을 담은 평화 협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동안, 볼리비아는 아타카마 지역에 조금 남아있던 푸나 아타카마  Puna de Atacama 칠레에 양도하여 전쟁 부채를 탕감하였고, 지역은 다시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나눠가지게 되면서 안토파가스타와 아타카마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완전히 잃게 된다


전쟁을 통해 칠레가 볼리비아로 부터 확보한 안토파가스타와 아타카마, 그리고 페루로 부터 차지한 아리카와 이키케

(출처: https://www.economist.com/the-americas/2015/05/09/beaches-of-the-future)


1899로 표시된 영역이 푸나 데 아타카마 지역으로, 볼리비아로 부터 칠레가 양도받은 이 지역의 대부분은 다시 아르헨티나로 넘어갔다.

이런걸 보면 진짜 아르헨티나가 손 안대고 코 푼게 맞는듯 하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Puna_de_Atacama_dispute)


1904 평화 협정 , 칠레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항구를 결코 볼리비아에 돌려줄 수는 없으나, 볼리비아가 태평양과 마주한 항구를 이용하는데 있어 편의를 제공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아타카마 지역을 통한 어떠한 종류의 물자 운송에 대해서도 모두 허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전쟁을 통해 페루로부터 차지한 아리카 Arica 항구에 대한 볼리비아 측의 접근성을 높여주려는 움직임이다. 아리카는 볼리비아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다. 칠레는 평화 협정의 대가로 아리카에서 볼리비아의 실질적 수도 파스까지 운행하는 아리카 - 파스 철도 Ferrocarril de Arica–La Paz (FCALP) 건설하였다. 그러나 볼리비아는 칠레가 소유한 볼리비아 인근의 항구에 대한 영유권을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1970년대 들어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비슷한 시기에 군부 출신으로 볼리비아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 우고 반세르 Hugo Banzer와의 협상을 통해 아리카 항구와 인접한 페루 국경 지대를 볼리비아에 넘겨주고, 같은 크기의 다른 볼리비아 영토를 넘겨 받는 식의, 이른바 '영토 교환'을 통해 양국간의 영토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과거 페루의 영토를 다른 국가에 양도할 때는 페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페루와 칠레 간의 평화 협상 조항 때문에, 영토 교환을 하기 위해서는 페루의 허락이 필요했다.


아리카 항구를 내심 되찾고 싶어했던 군부 출신의 페루 독재자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무데스 Francisco Morales Bermúdez는 양측의 영토 교환 계획에 반대했다. 대신, 아리카 항구와 인근 영해에 대한 3 공동 소유를 요구하였는데, 이에 칠레 측이 항구의 영유권만큼은 넘겨줄 수 없다며 협상을 결렬시켰다. 협상 이후 볼리비아 내부에서는, 안그래도 안토파가스타에 대한 영유권 상실로 칠레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어마어마했던 볼리비아였기 때문에, 협상 결렬로 지지기반을 잃은 반세르 정권은 얼마가지 않아 무너졌고, 볼리비아에는 민주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이후 볼리비아 외부에서의 상황은 당연하게도, 칠레와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상태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당시 피노체트가 양도에 합의 했던 영토 (빗금친 부분). 페루와 칠레의 태평양 전쟁에 대한 평화 협정 중에는 페루의 옛 영토를 칠레가 다른 국가에 양도하려 할때는 페루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항이 담겨있었다.


1980, 주변국으로 부터 영토 분쟁에 휘말려있던 피노체트 정권은 주변국의 영토 침략을 막겠다는 이유로 미국, 벨기에 등지에서 수입한 지뢰 18만여개를 영토 분쟁 지역에 매설했다. 이후 대인 지뢰를 금지한다는 오타와 협약 Ottawa Treaty 칠레가 가입하게 되자, 볼리비아는 안토파가스타 국경 지대에 매설한 수만 개의 지뢰를 문제삼아 양국간의 영토 분쟁을 공론화하려 했다. 뿐만 아니라 볼리비아 국경지대에서 발원한 강이나 볼리비아 영토에 매장된 천연가스와 같은 자원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칠레가 이를 활용하여 부수적인 혜택을 얻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볼리비아는 영토 분쟁에 대한 지속적인 공론화와 함께, 국제법이 규정한 적합한 절차를 통한 영토 수복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지난 10월 국제사법재판소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볼리비아 측의 영해 요구 협상을 칠레 측에 강요할 없다는 최종 판결을 내림으로써, 볼리비아 측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민간 수준에서의 거래에는 어떠한 제약도 없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아타카마와 우유니를 아무 문제없이 왕래하고 있다.


안토파가스타에 있던 볼리비아 해군은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 위치한 티티카카 호수 Lago Titicaca에서 지금도 해상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 https://andreasmoser.blog/2016/12/15/diadelmar/)


티티카카 호수에 가면 볼 수 있는 벽화. 볼리비아 군이 칠레 군을 사살하는 장면이다. 맨 위에 적힌 문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때 우리 소유였던 것은 언젠가 다시 우리 소유가 될것이다' (출처: https://andreasmoser.blog/2016/12/15/diadelmar/)


재밌는 사실은,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파타고니아의 국경마저도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볼리비아의 비밀 군사 동맹에는 다른 나라 하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칠레는 아르헨티나마저 볼리비아 편에 서게될 경우 아무리 유럽의 지원을 받는다하더라도 승산이 없을 거라 여겼다. 이전부터 아르헨티나는 파타고니아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칠레에 군사적 위협을 가해왔고, 안토파가스타 지역은 아르헨티나와도 인접한 지역이었다. 결국 칠레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집중하고 아르헨티나의 개입을 막기 위해 파타고니아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포기해버렸고, 자연스레 안데스 산맥 동부의 거대한 파타고니아 지역은 아르헨티나가 차지해버렸다. 아르헨티나는 비밀 군사 동맹에 가담한 것만으로 거대한 땅을 손쉽게 차지하게 되었으니, 일부에서는 아르헨티나를 태평양 전쟁의 실질적인 승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아무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파타고니아 여행을 하는 동안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을 왔다갔다 하며 고생을 하지 않았어도 될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태평양 전쟁은 남미 대륙의 남부를 관통하는 거대한 국경 분쟁의 역사를 야기했고, 지금 우리가 남미를 여행하며 넘나들고 있는 것은 단순히 국경의 의미를 넘어서 (아주 아주 거창하게 말하면) 남미 근대사의 족적이라고도 있다.


남미의 국경, 이렇게 바뀌어 갔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South_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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