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미 여행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시작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출발하여 최남단 지역인 우수아이아로 내려간 후, 거기서 부터 파타고니아 지역을 여행하고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것이 1차 목표였고, 이후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아타카마를 거쳐 볼리비아 국경과 우유니를 지나 라파스까지 이동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마침 여행 기간이 볼리비아와 페루의 우기였는데, 우기에는 우유니 소금사막에 비가 내려 거울 현상을 보기는 쉽지만, 비구름이 많기 때문에 마추픽추를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우유니 지역을 일정에 포함시켰고 페루는 일정에서 뺐다. 그리고 이과수는 다음에 브라질 여행 때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정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지금껏 후회하고 있다. 남미를 가보니 왠지 브라질은 평생 못 가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비행기를 타고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이동해야 했는데, 한국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는 방법은 크게 2가지이다. 하나는 유럽을 경유하여 가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북미 지역(특히 미국)을 경유하여 가는 방법이다. 적어도 2016년 연말 당시 많은 이들은 에어 캐나다나 아메리칸 항공(이른바 AA) 같은 곳을 통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남미를 갈 수 있는 방법을 추천했다(아마 이 방법은 지금도 어느정도 유효할 것이다). 다만 북미 지역 중 미국을 경유하게 된다면 입출국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경유 시간도 많이 걸리고 절차도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촉박하게 여행 일정이 잡혔던 나는 라탐 항공사의 이른바 ‘세계 일주’ 티켓을 구매했는데, 갈때는 유럽 경유로 남미를 가고, 올때는 북미 경유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표였다. 그러니까 비행기 안에서 세계 일주가 가능하긴 하다.
원월드 소속의 라탐은 칠레의 란 항공사와 브라질의 탐 항공사가 합쳐 만들어진 남미 최대 항공사이다. 여행 당시 한국에서 페루와 멕시코, 쿠바를 중심으로 남미 여행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국에서도 세계 일주 티켓을 내세워 한창 홍보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발권을 받는 과정에서 이 티켓의 매우 복잡한 문제를 알게 되었다. 실제 라탐 비행기를 타는 구간은 ‘유럽 >>> 남미’ 구간과 ‘남미 >>> 북미’ 구간이고, 나머지 ‘한국 >>> 유럽’ 구간과 ‘북미 >>> 한국’ 구간은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야했는데, ‘한국 >>> 유럽’ 구간은 대한항공이 직접 운행하는 구간이고, ‘북미 >>> 한국’ 구간은 코드쉐어로 운행되는 구간이었다. 그런데 스카이팀의 대한항공과 원월드의 라탐은 서로의 다른 동맹에 속해 제휴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환승이더라도 발권은 각각 따로 받아야 한다. 즉 대한항공에서 라탐으로, 혹은 라탐에서 대한항공으로 바뀌는 구간마다 무조건 항공사 부스로 찾아가서 새 티켓을 발권받아야 비행기 탑승이 가능했다. 게다가 직원들조차 어디서 어떤 식으로 발권을 새로 받아야 하는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 못한체, 그저 새로 받으면 된다고만 말했다. 심지어 코드쉐어로 운행되는 로스 앤젤러스 - 인천 구간에 대한 마일리지 적립은 대한항공이 아닌 라탐 쪽에서 가능했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와서 한동안 마일리지 적립한다고 진짜 애먹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결국 직접 부딪혀보는 방법 밖에 없었는데…대한항공을 이용해 밀라노에 도착한 뒤, 곧장 티켓 발권을 위해 밀라노의 라탐 항공사 부스를 찾았다. 하지만, 일단 부스까지 가는 길을 막고 선 직원이 나를 통과시켜주지도 않았고, 어떻게 해야 통과할 수 있는지 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티켓이랑 여권이랑 이것저것 보여주다가 수하물 표를 보더니 통과시켜주었다. 이후로도 라탐 항공사 부스를 한참동안 찾아다녀야 했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직원이 너무 많아 발권 또한 무척 까다로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나와 같은 상황에 있었던 상파울로 교포분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유창한 포르투갈어를 구사하시던 교포분 가족들 덕분에 부스도 찾고 티켓도 발권받아 무사히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최근 오슬로 - 이스탄불 - 인천 구간을 이용할 때 이스탄불에서 능숙(?)하게 재발권을 할 수 있었다.)
너무 우여곡절을 겪었던 나머지,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금방 잠이 들었다. 한 두어시간 정도 자다가 이제 공중에 떠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눈을 떴는데, 비행기가 여전히 땅에 있었다….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2시간 연착을 하고서야 비행기가 이륙했다.
상파울로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행 비행기로 환승을 해야했는데, 밀라노에서 2시간이나 연착을 했기 때문에 일정이 매우 촉박해졌다. 게이트를 빠져 나오자 마자 전속력으로 달린 덕택에 부에노스 아이레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기내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공항에서 해야할 일, 숙소 찾아가는 방법 등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자 마자 해야 할 것들에 대해 숙지하고, 빠뜨린 짐이 없는지 점검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항 활주로에 비행기의 랜딩 기어가 닿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당황하면서 나도 얼떨결에 박수를 쳤다. 이후 알게 되었지만 아르헨티나 비행기 승객의 전통(?)인듯 했다. 그렇게 내 몸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제때 무사히 도착하였는데, 내 캐리어는 그러하지 못했다. 한참 수화물을 찾아다니다 결국 생전 처음으로 ‘Baggage Claim’이라고 표시된 수화물 분실 센터를 찾아가 신고를 하게 되었다.
수화물 분실 신고가 끝나자 라탐 항공사 직원이 내게 바우쳐 같은 걸 주었다. 이걸 갖고 라탐 사무실로 찾아 갔더니 50달러에 해당되는 아르헨티나 페소를 주었다. 수화물 없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지내는 동안 이 돈으로 이것 저것 해결하라고 준 것이다. 나중에 민박집에서 이 얘길 했더니 수화물 분실 신고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곳은 처음봤다고 했다. 역시 남미에서는 라탐이 최고라면서.
비록 항공사에서 제공한 돈이 있긴 했지만, 앞으로 아르헨티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캐리어를 기다리는 동안, 갖고 있는 달러를 환전하기로 결심하고 암환전소를 찾아나섰다.
내가 처음 아르헨티나의 암환전 (Blue Dollar, Dólar Azul)에 대해 알게 되었을때, 아르헨티나의 고정 환율제 시행이 암환전의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정보가 아니다. 페소와 달러의 환율을 1대 1로 고정하던 아르헨티나의 고정 환율제는 1990년 말에 시작되어 아르헨티나 경제에 치유되기 힘든 부작용을 일으키다 2002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페소의 가치는 1/4로 폭락했는데, 정부는 낮아진 페소의 가치를 잘 활용하여 근현대사에 몇 없는 아르헨티나의 경제 부흥기를 이뤄냈다. 그러나 그 효과도 잠시 뿐, 2010년대 들어 외환 보유량이 급격히 줄어들자 외환 보유량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외환 통제책을 실행하게 된다. 즉,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페소를 달러로 바꾸는 것 자체를 규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수입품들에 의존하여 살아온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페소보다는 달러가 필요했다. 그래서 시중 은행이 아닌 외국에서 구해온 달러를 웃돈을 얹어서라도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은행을 통해서 환전하는 것보다 값을 더 쳐준다는 사람들이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그렇게 암환전이란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자연스레 암환전율은 정부의 공식 환율보다 더 낮게 형성되었고, 외국인들이 가져온 달러가 정부의 외환 보유고 대신 암환전상을 거쳐 시민들의 손에 쥐어졌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대 초반부터 타오르던 아르헨티나의 실질적인 경제 성장의 동력조차 꺼져가고 있었다. 외환 보유고가 채워지기는 커녕 줄어들기만 하자 정부의 규제는 더욱 심해졌고, 달러를 구하기 어려울 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암환전율과 공신 환율의 격차는 커지기만 했다. 환율 규제 정책이 갈팡질팡하는 동안 경제 침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결국 마우리시오 마크리 Maurisio Macri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경제 침체를 해소하겠다는 그의 뜻대로 침체의 원인으로 지목된 환율 규제는 해제되었다. 그러나 한때 기업의 경영가이기도 했던 마크리는 규제의 단순 해제에 그치지 않고 공식 환율 자체를 암환전율 수준으로 급격히 낮춰버리는 선택(평가 절하)을 했고, 물가 상승을 부추기는 정책과 임금 상승을 막는 정책을 병행하여 국민들의 실질 소득을 낮춰버렸다. 이른바 아르헨티나의 낙수정책을 편 것인데, (우리 모두의 예상대로) 결과적으로 중소 기업의 파산과 저소득층의 빈곤을 야기했고, 최근 미국의 금리 인상에 의한 자본 유출량 마저 급격히 커지자 IMF의 구제 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경제 구원자를 자청한 기업 친화적 대통령 후보가 IMF 구제 금융이 필요한 대통령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인 출신에 반 포퓰리즘의 기수라는 그의 이미지 덕분에 국내외 보수 언론이나 경제지로 부터 여전히 많은 기대와 비호를 받고 있지만, IMF와의 많은 악연을 갖고 있는 아르헨티나 국민들 입장에서는 마크리의 이런 행보가 매우 탐탁지 않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이 악연에 대해서는 ‘15편.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상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이렇듯 끊임없이 반복되는 혼란스런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 덕분에, 이전과 같은 강력한 환율 규제는 없지만 수입 규제와 같은 여러 외환 규제가 존재하며, 경제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공식 환전율과 암환전율 사이의 차이가 계속 변하고 있다. 내가 여행할 당시(2017년 초)에는 약 5~8% 정도의 환율 이득이 있어서 많은 금액을 환전할 경우 이득이 꽤 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암환전을 위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은 플로리다 거리일 것이다. 시내 중심가인 이곳 거리를 돌아다니면 음흉한 목소리로 ‘깜비오 깜비오’를 외치는 무서운(?) 아저씨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처음 해보는 암환전이었기 때문에 대체 누구에게 암환전을 해야할지 많이 고민했는데, 일단 내 돈을 들고 튀려했을 때 싸워서 뺏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았다. 그 기준을 무척 충족시키는, 메시를 닮은 자그마한(아르헨티나 가면 은근 메시 닮은 사람이 많다. 남자는 최소 메시 수준으로 생겼다고 보면 될듯) 아르헨티나 아저씨에게 환전을 요구했다. 그러자 아저씨가 어두컴컴하고 경비가 삼엄한 사무실로 나를 끌고 갔고 엄청난 덩치의 젊은이가 돈을 한장한장 세어 내게 보여주었다. 대체 내가 왜 굳이 메시 아저씨를 선택했나 자괴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환전한 돈으로 가장 먼저한 일은 소고기와 아이스크림 사 먹기였다. 아르헨티나는 전세계 소고기 섭취량 1위의 국가이다. 아르헨티나 사람이 자국에서 하던 것처럼 한국에서 소고기를 사먹으면 거지가 된다는 말처럼, 소고기가 매우 많고 심지어 매우 쌌다. 소고기 안심 500g을 마트에서 5000원 정도에 팔 정도였다. 또한 소에게서 생산되는 유제품도 매우 풍부하고 질이 좋았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에 의해 다양한 이탈리아의 음식 문화가 전파된 아르헨티나에서는 엘라도(Helado)라 불리우는 아이스크림이 이탈리아의 젤라또에 버금간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다만, 젤라또가 피스타치오나 리조처럼 뭔가 재료 본연의 순수한 맛을 추구한다면, 엘라도는 둘세 데 레체 Dulce de Leche 같이 좀 더 다양하게 가공된 맛을 추구한다는 느낌이었다.
암튼 암환전을 통해 돈도 조금 절약했고, 아이스크림과 안심 스테이크를 먹었다. 집에 돌아왔더니 마침 라탐에서 보내준 캐리어도 도착해있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번갈아 경험하면서, 시작부터 매우 여행답다고 생각했다.
- 1. 부에노스 아이레스, 끝.
'Travel > Patagonia, and mo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3. 푼타 아레나스 Punta Arenas (0) | 2018.11.12 |
---|---|
2. 우수아이아 Ushuaia (3) - 비글 해협 + 펭귄 투어 특집 (0) | 2018.11.12 |
2. 우수아이아 Ushuaia (2) (0) | 2018.11.12 |
2. 우수아이아 Ushuaia (1) (0) | 2018.11.12 |
미리 알립니다 (0) | 2018.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