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바릴로체 Bariloche (2)
샤오샤오 호텔 근처 선착장에서는 바릴로체의 가장 전통적인 선박 투어를 경험할 수 있다. 투리 수르 Turi Sur가 운영하는 이곳 투어는 크게 3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가장 대중적이고 무난한 투어는 이른바 ‘식물원’ 투어라 불리우는 이슬라 빅토리아 Isla Victoria 투어로써, 바릴로체 인근의 독특한 식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가장 전통적인 크루세 안디노 Cruce Andino 투어는 중세 시대부터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연결해 준 안데스 산맥의 아주 오래된 길을 통해 바릴로체에서 칠레 푸에르토 바라스 Puerto Baras까지 이동하며 과거의 루트를 체험하면서 안데스 산맥 주변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투어이다.
마지막으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푸에르토 블레스트 Puerto Blest 투어는 반쪽짜리 크루세 안디노 투어라고 할 수 있다. 크루세 안디노 투어와 동일한 경로로 진행되며, 국경을 넘어 칠레로 입국하는 크루세 안디노와 달리, 라고 프리아스 Lago Frías를 항해하여 칠레 국경이 위치한 푸에르토 프리아스 Puerto Frías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투어인데, 크루세 안디노를 즐기고 싶지만 칠레 국경은 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투어라는 느낌이 강했다. 독특한 초록색을 띈 빙하 호수인 라고 프리아스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사이에서 발생한 파타고니아 영유권 논란 당시 아르헨티나 측의 논리를 입증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였고, 그런 까닭에 프리아스 호수 끝에 두 나라 사이의 국경 검문소가 위치하게 되었다.
안데스 산맥 기슭에 위치한 이들 호수와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던 여행사 직원이 사진을 많이 찍어야 하니 카메라 베터리랑 메모리 카드를 넉넉히 준비해야 할 것이라면서 호언장담을 할만큼 투리 수르가 가장 밀고 있는 투어이다. 사실 나로써는 다음 행선지가 푸에르토 바라스 바로 옆에 위치한 푸에르토 몬트였기 때문에, 이 투어를 통해 칠레로 넘어갈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아르헨티나의 페리 투어에서는 유독 사진을 전문적으로 촬영해주는 직원들이 많이 보였는데, 이곳의 투어 역시 사진 담당 직원이 승객들의 사진을 촬영해주었다. 투어 참가자 중 유일한 동양인이자 영어 사용자였던 내게 사진 담당 직원이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며 협조를 부탁하는 바람에 폭포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촬영된 사진은 돈을 주고 구매할 수 있는데, 투어 종료 후 진행되는 행운권 추첨에 당첨되면 공짜로 받을 수 있다. 바릴로체 물가도 여느 파타고니아 지역 못지 않았기 때문에, 내심 당첨되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번호 하나 차이로 아깝게 당첨되지 않았다.
이분이 사진기사분이시다. 승객들에게 속성으로 사진 포즈 요령을 알려주는 중.
잘 생겼다.
여느 파타고니아 도시들 만큼 바릴로체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었는데, 좀 더 북쪽에 위치한 탓인지 기후도 좋고 먹을 것은 좀 더 풍부했다. 바릴로체의 먹거리를 얘기할 때, 초콜릿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 지역 이민자들에 의해 시작된 바릴로체 초콜릿의 역사는 수 많은 초콜릿 장인들과 공장들에 의해 발전하면서 바릴로체를 초콜릿의 도시로 바꾸었다. 길거리를 걷다보면 관광객으로 가득한 초콜릿 해 시식용 초콜릿을 나눠주는 사람들을 쉽사리 볼 수 있다. 다만 건물의 크기와 시식용 초콜릿의 수량은 반비례 관계였는데, 상대적으로 인기있고 유명한 상점일 수록 건물은 크지만 시식용 초콜릿으로 손님을 유혹할 필요성을 못느끼는 듯 했다.
수년 째 바릴로체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다는 이탈리아 출신의 숙소 주인은 내게 두 군데 상점 - 마무슈카 Mamushka (러시아 어로 ‘엄마’라는 뜻인데, 마트로슈카의 다른 표현이기도 함)와 라파 누이 Rapa nui(이스터 섬에 사는 원주민을 지칭) - 을 추천했다.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마무슈카는 다른 바릴로체 초콜릿들에 비해 초콜릿 본연의 맛에 좀 더 집중하는 곳이다. 바릴로체 초콜릿 업계 최초로 코코아매스를 자체 생산한 곳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이민자가 세운 바릴로체 지역 최초의 초콜릿 공장이 그 기원인 라파 누이는 바릴로체 초콜릿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해왔다. 이렇게 보니 가장 초콜릿다운 초콜릿과 가장 바릴로체다운 초콜릿의 대결 같다.
이곳이 마무슈카
또 한가지 유명한 바릴로체의 먹거리는 스테이크이다. 이것 또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에게서 비롯된 식문화라고 생각되는데, 35년 간 바릴로체에 군림해온 오랜 전통의 스테이크 하우스 엘 볼리체 데 알베르토 El Boliche de Alberto, 일명 알베르토는 바릴로체를 방문하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관성처럼 꼭 들리는 곳이다. 사실 현지인들은 이곳을 엘 볼리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데, 알베르토라고 해도 알아듣기는 한다. 처음 운영될 당시 바릴로체 최고의 스테이크 하우스로 불리면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는데, 지금은 여러 지점이 생기면서 예전의 명성이 조금 퇴색되었다고 한다.
외국인을 중심으로 떠오르는 신흥 강자는 알토 엘 푸에고 Alto El Fuego라는 스테이크 하우스이다. 내가 남미를 다녀온 직후 즈음부터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입소문이 돌기 시작한 곳인데, 들어본 말로는 안심이나 등심 처럼 고기 질 자체가 훌륭한 부위는 알베르토와 크게 차이나지 않으나,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부위는 훨씬 더 잘 굽는다고 한다. 알베르토의 부족한 1%를 채워준다나. 나의 이탈리아인 숙소 주인은 내게 파타고니아는 역시 양이라며 양고기집을 추천해줬다. 돈 몰리나 Don Molina 라는 곳인데, 양고기에 대한 호불호 탓에 평이 많이 갈리는 곳이지만 어느 스테이크하우스 보다도 가장 파타고니아스럽고, 양고기를 좋아한다면 이곳이 바릴로체 최고의 맛집일 거라며 엄지척을 했다. (여러모로 느꼈지만 주인 아저씨 취향은 정말 확실하다: 가장 본질적인 것이 가장 좋다.)
그 밖에도 수 많은 맛집들이 즐비하고 볼거리도 많은 바릴로체이지만, 바릴로체를 돌아다니며 엘라도를 먹는 내내, 나는 바릴로체가 좋다는 생각보다는 스위스를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바릴로체는 모든 게 수준미달이었지만, 자신들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착각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숙소 주인은 올 여름을 끝으로 더이상 바릴로체를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바릴로체에 있던 자신의 모든 자산을 처분하느라 여념이 없던 그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생활 수준과 살인적인 물가 사이에서 큰 괴리감을 느낀다고 했다. 매년 바릴로체에서 여름을 보낼 때마다 물가는 계속 치솟았지만 삶은 나아진 것이 없다고 한다. 여전히 서비스는 엉망이고 제대로 된 것이 없지만 요구하는 돈은 계속 늘어만 갔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이 정도 물가 수준의 부를 누리기엔 아직 많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수준이 된다고 착각하는 중이라고 비판했다. 차라리 아르헨티나를 다시 올바엔 칠레를 갈거라며, 뭘하든 칠레가 아르헨티나 보다 낫다고까지 했다. 오죽했으면 단지 사장이 칠레인이란 이유로 비바 바릴로체란 버스 회사를 이용할 것을 추천해주기까지 했다. 바릴로체에서의 여행을 통해 파타고니아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감춰진 아르헨티나 경제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바릴로체 도심을 걸어다니다 나우엘 우아피 호수 근처에 위치한 빙상장을 우연히 구경하게 되었는데, 이곳 빙상장에는 피겨스케이팅 선수 사진이 딱 한 장만 걸려 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바로 김연아이다. 김연아의 사진을 지구 반대편 빙상장에서 발견한 순간은 한국을 떠나 있던 동안 경험했던 가장 예상치 못한, 가장 뭉클했던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